두 번째 숯불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났다가 돌아와 그 미래를 정의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던 주님을 부인했지만, 그가 넘어졌던 바로 그런 숯불 곁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이 실패와 수치, 그리고 먼저 찾아오는 은혜에 대해 말하는 것.
스티브 잡스는 한때 실리콘밸리의 총아였습니다. 이십 대에 그는 차고에서 애플을 공동 창업했습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애플은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회사 중 하나로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명석했습니다. 비전이 있었습니다. 조금 과했습니다.
그리고 서른이 되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경쟁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시장이 돌아섰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내부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잡스는 자기 경영진과 충돌했습니다. 이사회는 그의 반대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기술 업계를 놀라게 한 결정으로,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서 해고되었습니다.
자신이 시작한 회사에서 해고된 것입니다.
그는 훗날 그것을 참담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공개적인 실패, 개인적인 수치,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그런 순간이었다고요. 그는 자기 인생의 중심이 뜯겨 나간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심하게 넘어졌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합니까?
한동안 그는 표류했습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라지는 대신 그는 다시 시작했습니다. NeXT라는 작은 회사를 세웠습니다. 훗날 픽사가 될 작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투자했습니다. 천천히, 조용히 그는 다시 세워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성공에서가 아니라 실패에서요.
그리고 여러 해 뒤, 비즈니스 역사상 가장 뜻밖의 전환 가운데 하나로 애플이 NeXT를 인수했습니다. 한때 그를 내쳤던 회사가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잡스는 그저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애플을 가장 상징적인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iMac, iPod, iPhone. 한때 쫓겨났던 사람이 그 회사의 미래를 다시 정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 이야기가 우리를 사로잡는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 모두가 그 감정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수십억짜리 회사에서 해고되는 일이 아니더라도, 실패의 경험 말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순간. 후회하는 결정. 어떤 부인. 어떤 타협.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순간.
내가 너무 멀리 왔구나. 이걸 망쳐 버렸구나. 돌아갈 수 없겠구나.
그리고 그 질문이 조용히 맴돕니다. 실패 뒤에는 무엇이 옵니까? 돌아갈 길이 있습니까 — 원래 있던 자리로만이 아니라, 더 깊은 무언가로요?
요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회의실이 아니라 바닷가에서. 회사를 잃은 뒤가 아니라 자기 구주를 부인한 뒤에요. 그리고 이어지는 일은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돌아간 것보다 훨씬 더 놀랍습니다.
이야기를 다시 잇는 지점
배경을 조금 말씀드리면, 요한복음의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셨으며 — 제자들에게 이미 두 번 나타나셨습니다.
첫 번째는 요한복음 20장 19–23절, 제자들이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보이시자 그들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두 번째로, 첫 번째 나타나심을 놓쳤고 다른 이들이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말했을 때 믿기를 거부했던 도마가 마침내 자기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그 옆구리 상처에 손을 넣어 보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상처들은 패배의 표가 아니었습니다. 정반대였습니다. 승리의 증거가 드러나 있었던 것입니다. 도마는 의심에서 믿음으로 옮겨 갔습니다.
베드로는 그 두 번의 나타나심에 다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 보았습니다. 그러니 요한복음 21장을 읽기 전에 잠시 붙들고 있을 만한 질문이 있습니다. 며칠 전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알면서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베드로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1. 자기 의존의 헛됨
베드로의 문제는 그가 실패했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한 뒤에 그가 은혜가 아니라 자기 의존에 손을 뻗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알았습니다. 의심과 씨름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일이 있고 나서 베드로는 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했을까요? 왜 옛 삶으로 돌아갔을까요?
의심보다 더 무거운 무언가가 베드로의 마음에 얹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수치였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 26:33)라고 자신 있게 선언했던 사람입니다. 더 담대하게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 26:35)라고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믿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뒤, 예수님이 그를 가장 필요로 하셨을 때 베드로는 세 번 그를 부인했습니다. “주를 위해 죽겠다”고 말한 사람이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그는 가장 사랑하는 분을 저버렸습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예수님이 정말 나를 용서하실 수 있을까? 여전히 나를 신뢰하실 수 있을까? 내가 아직 그분께 쓸모가 있을까?
베드로는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전히 자기와 무언가를 함께하기 원하시는지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가 아는 것으로 돌아갔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고기잡이는 그저 취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옛 정체성이었습니다 — 자신이 유능하다고 느끼던 자리, 무엇을 해야 할지 알던 자리, 자기 실패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던 자리요.
그런데 흥미로운 세부가 있습니다. “그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라”(요한복음 21:3). 베드로가 안정을 찾아 돌아간 그것은 그가 필요로 하던 것을 줄 수 없었습니다. 위로를 주리라 여겼던 것이 그를 빈손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아마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바로 거기 있을 것입니다. 수치를 짊어질 때 우리는 흔히 어딘가로 달아납니다. 어떤 이는 일로 달아납니다 — 멈추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마주해야 하니까 매 순간을 생산성으로 채웁니다. 어떤 이는 딴 데로 달아납니다 — 화면을 넘기고, 스스로를 즐겁게 하고, 아픔을 다루지 않아도 되도록 머리를 계속 바쁘게 합니다. 어떤 이는 관계나 어떤 물질이나 성공으로 상처를 마취하려 합니다 — 안도를 약속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요.
그러나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아픔은 따라옵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상처는 그것을 피하려고 쓰는 것들로는 치유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빈 그물은 하나의 일깨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으십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고친 뒤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입증한 뒤도 아닙니다. 빈 그물과 부서진 마음,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숯불과 함께, 바닷가에서입니다.
2. 은혜의 초대
은혜는 베드로가 예수님께로 기어 올라가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은혜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시는 데서 시작됩니다.
빈 그물의 밤이 지나고 예수님이 물가에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그분을 즉시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 하고 그들이 대답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한복음 21:5–6).
그들이 순종하자 갑자기 그물이 물고기로 가득 차 끌어올릴 수조차 없습니다. 요한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즉시 알아차립니다. “주님이시라!”(요한복음 21:7).
왜 이 장면이 익숙하게 느껴질까요? 실제로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해 전에 베드로는 거의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았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잡힌 것이 너무 많아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부르신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 해 뒤에 예수님이 그것을 다시 하십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깨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야, 너는 실패한 어부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너는 여전히 내가 부른 그 사람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실패보다 훨씬 전에 시작된 이야기를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법을 아신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점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아십니다 — 우리의 내력, 우리의 기억, 우리 마음에 곧바로 말을 거는 작은 세부들까지요. 때로 하나님은 오직 우리에게만 의미 있는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저의 경우, 하나님이 종종 숫자를 — 특히 제 생일을 — 그분의 임재를 일깨우는 표로 쓰신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우리 가족이 새집으로 이사했을 때 한 이웃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하나님이 제 마음에 이런 감동을 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그분이 우리를 그곳에 두신 한 가지 이유가 이 이웃 때문일지도 모른다고요.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아주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확증을 주셨습니다. 제 생일이 이 이웃의 결혼기념일과 같은 날이었던 것입니다.
여러 해 이웃으로 지낸 뒤 그가 임신했습니다. 임신 중에 아기에게 다운증후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매우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앞으로 겪을 일을 감당할 힘이 자기에게 있을지 의심했습니다. 제 아내가 그 시기에 그의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고, 두려움과 불확실함을 함께 걸어 주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아기를 낳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운증후군이 있는 아이를 기르는 일이 늘 쉽지는 않습니다. 어려움도 있고 알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는 하루하루 필요한 은혜와 힘을 하나님이 주시리라는 것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어떻게 닿아야 할지 정확히 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일지 모릅니다. 당신에게 건네는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그분은 어떻게 당신을 보고 계심을 일깨우십니까? 하나님이 “내가 여기 있다.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 하고 부드럽게 속삭이신 순간들은 언제였습니까?
예수님은 바로잡기 전에 먼저 공급하신다
이 본문에는 놓치기 쉬운 또 하나의 세부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물가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이미 아침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요한복음 21:9).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에 관한 대화로 시작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야,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라고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십니다. 먼저 먹이십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베드로가 지쳤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배고픔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영적으로 회복시키시기 전에 그를 몸으로 돌보십니다.
여기에는 깊이 위로가 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우주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쳤거든 와서 아침을 먹으라. 무거운 짐을 지고 있거든 내게로 오라.” 예수님은 우리를 기계처럼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 몸을 아십니다. 우리 한계를 아십니다. 때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영적인 일이 쉬고, 먹고, 그분의 돌봄을 받는 것임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이들과 복음을 나눌 때에도 그들의 영적 필요만 살피고 육신의 필요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자를 먹이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돌보셨습니다. 때로 누군가의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 그의 영적 필요에 말을 건넬 문을 여는 것입니다. 은혜는 흔히 아주 평범한 것들을 통해 옵니다. 한 끼 식사, 한 번의 대화, 들어 주는 귀, 아픔 가운데 곁에서 함께 걸어 줄 한 사람.
달라졌지만, 알아볼 수 있는
요한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세부를 줍니다.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요한복음 21:12). 이상한 문장입니다 — 왜 묻고 싶어 했을까요?
예수님의 무언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저 소생한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새로운 실재로 들어가셨습니다. 같은 예수님이시되 변화되신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즉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행하심을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 기적 같은 그물, 익숙한 음성, 물가에 준비된 아침 식사요. 그들은 알았습니다. 이분은 예수님이시다.
어쩌면 예수님은 우리 삶에서도 자주 그렇게 일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즉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며 깨닫습니다. 그분이 거기 계셨구나. 나를 인도하고 계셨구나. 나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고 계셨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부르심을 일깨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셔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베드로가 양을 먹이라고 보내심을 받기 전에, 예수님은 먼저 그 목자를 고치셔야 합니다.
3. 사랑의 회복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에 대한 기억을 피하는 방식으로 그를 고치지 않으십니다. 그를 그 자리로 곧장 데려가십니다 — 다만 이번에는 은혜와 함께요.
이 본문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작은 세부가 하나 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요한복음 21:9). 언뜻 평범해 보입니다 — 예수님이 아침을 지으셨고, 생선이 있었고, 떡이 있었고, 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단어를 아주 신중하게 고릅니다. “숯불”에 쓰인 헬라어 단어는 안드라키아(anthrakia)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신약 전체에서 오직 두 번만 나옵니다.
첫 번째는 여기가 아닙니다. 유일한 다른 한 번은 요한복음 18장,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밤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막 끌려가신 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웠습니다.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숯불(안드라키아)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한복음 18:18).
같은 단어. 같은 종류의 불.
이제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부드러운 대화 가운데 하나에 이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돌아서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5).
헬라어로 예수님은 아가페라는 단어를 쓰십니다 — 가장 높은 형태의 사랑, 자기를 내어 주는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베드로야, 너는 온전히 자기를 내어 주는 헌신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쓰는 단어는 아가페가 아닙니다. 필레오입니다 — 형제의 사랑, 깊은 애정이지만 온전한 굴복과는 같지 않은 것이죠.
베드로는 더 이상 “주를 위해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낮아졌습니다. 이제 그런 종류의 사랑을 자처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깊이 아낍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자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 다시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필레오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같은 양상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사랑을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그보다 낮은 사랑으로 답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이 옵니다 —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단어를 바꾸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하느냐?”(요한복음 21:17). 그분이 베드로의 자리까지 내려오십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나를 친구로서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느냐?”
그리고 여기서 베드로가 무너집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세 번째로 물으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했다고 말합니다 — 단지 세 번 반복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질문을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실패의 바로 그 자리를 건드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더 이상 자기 힘에 호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아심에 호소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이제 제 마음조차 믿지 못합니다 — 그러나 주님은 저를 아십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다.
은혜는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만난다
여기서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줄 수 없는 것을 베드로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를 만나십니다. 베드로는 아가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필레오를 받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말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다. 진실한 마음을 찾고 계십니다.
세 번의 부인. 세 번의 회복.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의 부인. 세 번의 회복. 그런데 예수님이 하고 계신 일을 보십시오. 그분은 베드로를 용서만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 그를 직분에 복귀시키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베드로에게 맡기십니다. 공개적으로 실패한 사람이 이제 공개적으로 이끌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이 이제 예수님의 양 떼를 돌보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은혜의 스캔들
이 이야기를 우리가 썼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먼저 베드로가 자신을 증명하게 하자. 몇 년쯤 조용히 섬기게 하자. 평판을 다시 쌓게 하자.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하십니다. 그를 온전히 회복시키십니다. 왜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위치는 우리의 성과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은혜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그분께로 다시 달려갑니다. 그분에게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요. 먼저 자신을 씻어 내지 않습니다. 돌아가기 전에 모든 것을 고쳐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또 실패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같은 일을 다시 합니다. 그분께로 다시 달려갑니다. 또다시. 또다시. 또다시.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거듭된 실패로 고갈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참된 정체성
이것은 우리가 깊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정체성은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이 받아들여진 것은 강해서가 아니고, 한결같아서가 아니고, 늘 옳게 해내서가 아니라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분의 희생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수가 이렇게 속삭이는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너를 좀 봐. 또 실패했잖아. 이번이 열 번째야. 그러고도 네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런 순간에 우리는 성과에 근거해 논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에 근거해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저의 아버지십니다. 그리고 그 무엇도 저를 그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 바닷가에서, 숯불 곁에서, 베드로는 자기 이야기가 실패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했던 바로 그 예수님이 그를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4. 비교로부터의 자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받아들여짐과 의미를 다른 데서 찾아 나섭니다. 그것은 흔히 비교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며 그의 재능을 부러워하거나, 그만큼 인기 있기를, 혹은 그만큼 말을 잘하기를 조용히 바랍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어떻게 죽을지에 관해 예언하십니다(요한복음 21:18–19). 우리는 역사를 통해 베드로가 순교했고,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택했다는 것을 압니다. 베드로는 마침내 예수님을 아가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희생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21절에서 베드로는 요한에 관해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베드로는 자신을 요한과 비교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한복음 21:22).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셨습니다.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주신 것으로 그분께 신실하라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주신 이에게 다섯 달란트 받은 이와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똑같이 사랑받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두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지으실 때 실수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은혜를 향해 달리십시오
이렇게 맺겠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성과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당신을 받아 주실지 궁금해하고 있었다면 — 그분을 저버렸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한 일이 부끄럽기 때문에 —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은혜를 향해 달리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분의 피가 우리의 구원을 확보했습니다 —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안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키사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베소서 2:6)라고 하셨으므로, 우리의 의미와 권세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시제를 보십시오 — 일으키셨고, 앉히셨습니다. 과거형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관한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지금 이 권세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인용은 개역개정판. 요한복음 21장에 관한 메시지에서 각색 —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한 뒤 이루어진 베드로의 회복.
